숙소 선정에 실패할까봐 이틀만 예약하고 왔던 히카두와의 숙소가 기대이상으로 좋아서 4일 정도 더 머물기로 했다. 그런데 그중에 딱 하루가 만실이라서 하루를 다른 숙소에서 지내고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그래서 메인 배낭은 맡겨두고 간단한 짐만 꾸려서 인근의 우나와투나로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예정에 없던 여행지라서 특별히 준비한 내용이 없어서 무작정 기차를 타고 가서 해변 근처의 게스트하우스들을 돌면서 하루를 지낼 숙소를 찾아다녔다. 역시 Finlanka에서 눈이 높아진 우리에게 대부분 숙소가 맘에 안 들었고, 그렇게 10군데의 방을 보고 가격 흥정을 했다. 날은 점점 더워지고 몸이 지치니까 서로 말은 안했지만 ‘이쯤 했으면 됐다. 그냥 적당한 곳에서 대충 하루 보내자!’가 되었다.
< 우나와투나로 향하는 기차 >
우나와투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명한 갈레 인근의 아름다운 해변 마을이다. 히카두와에 비해 파도가 잔잔해서 해수욕하기 좋고, 큰 도로에서 떨어져 있어서 거리도 조용한 편이다.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쉬었다가 마을을 구경하러 나왔다가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카페를 발견해서 들어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막 커피와 와플이 도착하는데 비가 쏟아졌다. 스리랑카 서부 해안에 몬순이 시작되려는 시기라서 종종 오후의 폭우를 만날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카페에 아내와 둘이서 비를 보며 차를 마시면서 문득 아주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그리워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야, 비도 오는데 어디 조용한 곳에서 비 보면서 커피 한 잔 할까?’ 라는 말을 여러면 들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그런 시간을 보낸 기억이 없다. ‘이런 날에는 어딜 가도 사람들이 많아서 시끄럽고 좋은 자리도 없을 거야 ‘라고 하면서 그냥 넘겨버렸었는데, 낯선 이국 땅에서 우연히 오래전에 꿈꾸었던 작은 바램을 이뤘다. 아내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좋은 점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그동안 일상에 치여서 소홀하게 했던 것들을 하나씩 챙길 수 있다는 점이 참 좋다.
< 비가 개인 다음날 아침 다시 찾았지만 문 닫은 카페 >
꽤 오랫동안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산이 없어서 미적지근한 열대의 비를 맞으며 달려서 숙소에 돌아왔다. 비가 오는 해변의 레스토랑은 겨울날의 빙수가게 만큼이나 매력이 없었기에 저녁 식사는 간단한 음식을 포장해서 숙소에서 먹기로 했다. 우산을 들고 혼자 여행자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아주 작은 버거가게를 발견했다. 편하게 앉아서 먹을 곳도 마땅치 않은 두 평 남짓의 가게에는 머리를 자른 밥말리를 닮은 아저씨가 환하게 웃으며 메뉴판을 건냈다. 내가 먹을 치즈버거와 아내를 위한 허니 크레페를 주문했지만 가게에는 치즈와 꿀이 없었다. 메뉴판에 음식 종류는 많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맨 위에 있는 햄버거와 과일 크레페 뿐이었다. 지나가는 서퍼들에게 간식을 팔 요량으로 단순한 재료와 간단한 레시피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고 아주 작은 가게에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버거가게 아저씨와 턱을 괴고 기다리는 나 사이에서 햄버거 패티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문답은 없었지만 작은 공간에서 같이 있는 동안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윽고 햄버거와 크레페가 완성되어 건네받고 돌아서는데, 자꾸 그 작은 버거가게가 눈에 밟혔다. 비오는 어두컴컴한 거리에 노란 백열등을 켜고 버거가게 아저씨는 여전히 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의 사람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 비오는 우나와투나의 해변 >
그리고 그날 저녁에 내 평생 가장 맛이 없는 햄버거를 먹을 수 있었다. 밥말리 아저씨 패티를 태우면 어떻합니까? 과일 크레페에 소스도 없이 달랑 망고만 넣어주시면 무슨 맛으로 먹으라는 건지요. 그러나 입안의 참혹한 현실은 비오는 날의 감성으로 달콤하게 포장되어 버려서 지금도 다시 그 가게를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 히카두와로 돌아오는 로컬버스 >
계획에도 없던 여행지였던 우나와투나는 비록 비가 와서 숙소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고, 습기로 눅눅하고 냄새가 났던 저렴한 숙소는 불편했지만, 비오는 날 카페에서 보낸 시간과 이른 저녁 버거가게에서의 아련한 기억 덕분에 마음 속에 꽤나 낭만적인 여행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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