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 전철과 트램을 타고 빌딩숲을 가로지르고, 거대한 인공섬 팜 주메이라 위를 모노레일로 달리면서 마치 신기루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불과 2주 전에는 나 역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면서 살고 있었기에 새삼 놀라운 풍경은 아니지만, 허허벌판의 사막에 세워진 현대판 오아시스와 같은 화려한 도시의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올드 두바이 지역을
방문한 날은 금요일이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금요일이 휴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한국인에게 으레 그렇듯이 쉬는 날이라도 관광지는
평일과 같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들에게 휴일은 확실하게 쉬는
날이었다.
금요일 오전에 두바이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 명소 중에 하나인 올드 시티에 도착했는데,
문을 연 상점이 없었다.
박물관,
식당,
기념품점도 모두 문을 닫고 심지어는
지하철과 버스도 오후 2시반까지는
운행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이슬람 사원에는 기도를 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전에도 이슬람 문화권을 여행할 때마다
무슬림들의 종교와 합일된 생활 모습에 감명받았던 기억이 있다.
알카에다,
IS와 같은 테러 단체로 인해 이슬람교에
대한 편견을 가졌었는데, 실제 무슬림의 삶은
영화나 뉴스에서 보이는 테러리스트와 달리
매일 종교의 의무를 다하고 꾸란에
의거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 결과 나는 두바이 시내에서 점심도
못 먹고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그 흔하디 흔한 맥도널도도 안 보이니 T T
< 한눈에 쏙 들어오는 두바이 박물관 >
오후 2시반이 되어서야 두바이 뮤지엄이 문을 열었다. 몇 해전에 카타르에서 석유로 갑자기 부국인 된 나라의 형편없는 수준의 박물관을 경험했었기에 이 나라의 박물관에 애초에 기대하는 것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단층으로 구성된 박물관은 역사적인 유물 대신에 진주조개 잡이와 유목으로 살아가던 부족이 석유 채굴을 시작하면서 세계적인 부국이 되는 성공 스토리가 전시되어 있었다. 노동과 저축으로 차곡차곡 곳간을 채우던 노동자가 큰 맘먹고 여행왔는데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졸부의 자랑거리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살짝 배가 아팠다.
< 요렇게 살던 두바이 사람들이... >
< 바닷가에 조그만한 마을이... >
< 석유를 발견하고 요렇게 됐어요! >
석유가 만든 기적은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지만, 바로 세계 최고층 빌딩인 부르즈 칼리파(Bruj Khalifa)와 세계 최대 쇼핑몰이라는 두바이몰에서 그 정점을 찍었다. 두바이몰 역에서 내려 부르즈 칼리파와 두바이몰까지는 10여분을 걸어야 할 만큼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 그 길이 통째로 냉방이 되어 있고 무빙워크가 깔려있었다. 그렇게 무빙워크에 빨려가듯 도착한 두바이몰은 소비지향 자본주의의 완결판이었고, 829.8m의 부르즈 칼리파는 인간의 만든 피조물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날씨가 맑아서 부르즈 칼리파 전망대에서 두바이 시내 전경을 볼 수 있었다. 허허벌판의 사막에서 빌딩숲이 올라가고 주거지역이 확장되는 장면이 상상이 되면서 ‘심시티’라는 게임이 떠올랐다. 도시 계획자가 되어 도시의 주요 인프라를 건설하고 유지보수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인데,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두바이의 모습이 마치 게임 속의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말하자면 사람이 만든 일종의 작품이지 여러 인간 군상이 부대끼며 살고 있는 삶의 현장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 부르즈 칼리파에서 내려다 본 두바이 시내, 게임 캡쳐 아님>
< 하늘을 찌르는 듯한 부르즈 칼리파, 모형 아님 >
최신 건축의 상징같은 두바이몰, 부르즈 칼리파와 전통 건축 양식의 알 바하 수크(Al Bahar Souk)의 사이에 있는 호수에는 매일 저녁에 30분 간격으로 음악과 함께 분수쇼가 펼쳐진다. 수많은 관광객이 호수 주변에 빼곡하게 자리를 잡고 분수쇼를 기다린다. 나도 전망좋은 자리를 잡고 기다리니 이윽고 음악과 함께 분수쇼가 시작됐다. 화려한 빛의 분수와 함께 노래의 전주 부분이 흘러나오는데, ‘익숙한 음악인데?’하고 생각하는 순간. ‘바바예투. 예투. 울리예~’ 게임 꽤나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는 그 노래, 바로 시드마이어의 ‘문명4’의 오프닝송이다. 사실 ‘바바예투~’까지 듣는 순간 이미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수 년전에 몇 일밤을 세워가며 허허벌판에서 국가를 세우고 문명을 이룩하던 시뮬레이션 게임 장면들과 두바이의 성장 과정에 대한 상상이 맞물려서 두바이에 와서 느꼈던 많은 생각과 느낌들이 한 번에 정리되는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한 번이라도 ‘문명’을 플레이해 본 사람이라면, 적어도 ‘문명4’ 오프닝 동영상을 본 사람이라면, 두바이에서 ‘바바예투’에 맞춘 분수쇼를 보고 게임의 실사판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어떤 여행지는 짧은 순간의 풍경으로, 어떤 곳은 특별한 냄새로, 어떤 곳은 한 곡의 음악으로 기억되는 곳이 있다. 나에게 두바이는 ‘바바예투’로 기억되는 도시가 될 듯하다.
< 전율의 '바바예투' 분수쇼 >
그런데, 이슬람 국가에서 ‘바바예투’ 라니... 너무 심하게 개방적인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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