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 탕헤르에서 페리를 타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드디어 스페인에 도착했다. 알헤시라스에 도착해서 숙소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일은 삼겹살 구이와 맥주 한잔. 이슬람 국가인 모로코를 여행하던 보름동안 돼지고기와 맥주가 어찌나 먹고 싶던지. 불현득 터키 여행 중에 돼기고기 먹으러 불가리아로 넘어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슬람 국가를 벗어나면 돼지고기 파티를 하는 것이 우리들의 행사가 되버렸다. 그렇게 지척에 있는 스페인 안의 영국땅 지브롤터 여행도 포기하고 돼지고기 맛에 흠뻑 취해서 하루밤을 보냈다.
< 알헤시라스로 가는 배에서 보이는 지브롤터 >
알헤시라스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 떨어진 거리의 론다(Ronda)에 도착했다. 알헤시라스는 관광도시라기보다는 산업도시같은 분위기라서 못 느꼈었는데, 론다 기차역을 나오자마자 ‘아 다시 유럽에 왔구나’ 하는 느낌이 확 밀려왔다. 10월초의 선선한 바람과 남유럽의 따뜻한 햇볕이 조합된 환상적인 날씨 덕분도 있지만, 작은 규모의 관광도시의 론다가 주는 포근함이 여행자의 기분을 ‘업’시켜 주었다.
론다는 걸어서 한 두시간이면 대부분의 명소를 돌아볼 수 있을만큼 작은 곳이라서 세비야, 말라가 같은 대도시에서 당일치기 여행으로 많이 온다. 사실 관광객이 찾는 명소라고 해봐야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는 거대한 다리인 누에보 다리 하나 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그 다리 하나만 보고 인증사진을 찍고나면 론다에서 볼 일(?)은 끝난 셈이라 생각하고 떠난다. 하지만 우리는 모로코의 혼란함 속에 있다가 와서 그런지 이 작은 도시가 주는 편안함 매료되어 3일간 지내면서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녔다.
장기여행을 하다보니 일정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서 맘에 드는 곳을 발견하면 좀 오래 머물기도 하고 기대 이하의 여행지는 잽싸게 떠나버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남들이 그렇게 좋다고 극찬을 하는 프라하에서는 사람 많아서 복잡하다는 이유로 2시간 만에 떠나버렸고, 오히려 유명한 명소가 없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여행지인 터키의 쿠샤다시나 불가리아의 부르가스에서는 일주일을 넘게 머물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가 꼭 나한테까지 적용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스페인 여행은 한 달의 여유를 두고 자유롭게 머물고 떠나기로 했다. 패키지 투어처럼 가능한 빠르게 보고 지나가면 스페인 전역은 물론이고 포르투갈까지 돌 수 있는 시간이지만, 많은 도시를 찍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몇몇 도시만 느긋하게 다닐까한다.
< 앙~ >
론다는 깎아지는 절벽 끝에 만들어진 도시로 깊게 파인 협곡을 중심으로 도시가 나뉘어져 있는 특이한 지형을 가지고 있다. 론다의 랜드마크는 이 갈라진 두 도시를 이어주는 ‘누에보 다리(Puente Nuevo)’ 이다. 150m에 가까운 높이의 거대한 걸작은 ‘새로운 다리’라는 뜻의 다리지만 사실 1793년에 완공된 ‘오래된 다리’이다. 그 당시의 기술력으로 이런 거대한 다리를 건설했다는 사실이 공돌이의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지만, 수 십명의 희생을 치르면서 42년 동안이나 고생해서 만든 이 다리는 120m 깊이의 협곡으로 갈라진 이슬람 마을인 구시가지와 기독교 마을인 신시가지를 연결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더 감동적이었다.
스페인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단어 중에 하나인 투우가 바로 이곳 론다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1785년에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투우장을 만들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오래전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면서 투우경기를 본 적이 있다. 그때 성난 황소와 멋진 투우사의 낭만적인 결투를 기대하고 갔다가 피터지는 도살 현장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남아 차마 투우장을 들어갈 수가 없어서 그냥 하얀색의 둥근 외벽만 돌아보았다.
< 협곡 아래에서 올려다 본 누에보 다리 >
< 엄청난 높이의 다리도 놀랍지만, 절벽 위의 아슬아슬한 건물도 대단함 >
< 투우가 처음 시작되었다는 론다 투우장 >
누에보 다리, 투우경기장을 보고 단체 관광객들이 버스로 발길을 돌리는 동안 우리 부부는 어슬렁어슬렁 동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아슬아슬한 절벽을 따라 만들어진 산책길을 걸으며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들으며 절벽 아래로 펼쳐진 안달루시아 시골 풍경을 감상하기도 하고,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도시 외곽의 초등학교를 찾아 한창 축구 연습중인 아이들을 보며 응원하기도 했다. 협곡 아래까지 내려가서 누에보 다리를 올려다 보기도 하고, 허름한 로컬 식당의 비스트로에서 식사를 하기도 하면서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냈다. 가이드북이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추천 일정이나 맛집 정보도 전혀 필요 없었다. 우리가 놓친 더 멋진 명소가 있을지도 기가 막힌 맛집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냥 뭔가 계획이 없는 듯이 준비를 안한 듯이 느리게 돌아다니는 게 마음이 편안했다.
< 론다 구시가지 밖으로 나가는 성문 >
< 론다 역시 안달루시아 특유의 하얀 마을 >
아마도 그동안 남들이 던져주는 정보를 들고 미션을 수행하듯 찾아다니는 여행에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여행 정보를 모으다 보면 ‘어느 도시에서는 꼭 어디를 가봐야 되고, 꼭 무엇을 먹어봐야 한다’는 목표가 생기기 마련이고 은연 중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난 6개월간 여행하면서 ‘남들이 간다고 나까지 반드시 갈 필요는 없다’, ‘가고 싶은 곳을 다 가볼 수는 없다.’를 배웠다. 그러면서 미션 수행하기 식의 여행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고, 마음 편하게 느긋하게 때로는 멍하게 여행지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어쨌든 이제 시작한 스페인 여행은 여행자 센터에서 제공하는 지도 한 장만 들고 느긋하게 다녀볼까 한다.
*** 론다 여행 Tips ***
Tip 1. 론다 버스터미널에 내리면 곧바로 눈앞에 짐보관소가 보인다. (심지어 한글로 써있다.) 말라가 - 세비야를 여행하는 길이라면 잠시 들러서 짐을 맡기고 누에보 다리를 감상하자.
Tip 2. 누에보 다리보다 먼저 만들어진 베키오 다리로 내려가면 누에보 다리와 두 마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멋진 공원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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