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지 한달이 넘어가면서 머리가 길어서 지져분해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기회에 머리를 길러볼까 생각도 했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한번도 머리를 길러본 적이 없었기에 귀를 덮는 머리카락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점점 길어져가는 옆머리와 뒷머리가 거추장스러워질 때쯤에 아내가 가위로 귀와 목 주변의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초보가 그렇듯이 옆머리의 좌우 길이를 맞추려다 보니 점점 짧아져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했더니, 좌우가 다른 모양인 ‘아수라 백작 컷’이 되버렸다. 그나마 다행히 한국에 계신 김선생님이 다듬어주신 윗머리가 남아있었기에 그런대로 참을만 했고, 귀를 덮는 머리가 사라진 마음에 기뻐 아내에게 연신 고맙다고 칭찬을 했었다. 그런데 그 칭찬이 아내를 춤추게 했으니...
머리 끝부분만 다듬으면서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제는 전면적으로 가지치기에 나서야 할 때가 왔다. 아내는 지난번 가위질이 신이 났었는지 유튜브를 보며 이발 기술을 ‘눈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실전에 옮겼다.
잠시후 내 머리는 여기 저기 폭격을 받은 모양으로 파먹은 누더기가 되었고, 흔히들 쥐가 파먹은 것 같다고 불리는 ‘쥐파먹 컷’이 완성!!
그리고 내내 모자를 쓰고 다녀야 했다. TT
요르단에 도착해서 암만 거리를 걷다보니 자꾸 미용실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문가의 손길을 느끼고 싶었지만, 물가가 비싼 암만에서 장기 배낭 여행자에게 미용실은 사치였다. 현지인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싶어서 호텔 직원 중에 좀 깔끔해 보이는 친구에게 저렴하게 이발을 할 만한 곳을 물어보니, 흔쾌히 나를 데리고 단골 이발소로 데려가서 이발소 아저씨와 상견례까지 시켜줬다.
< 어렸을적 동네 이발소를 다시 본 기분 >
호텔 직원이 떠나고 나서 깨달았다. 이발소 아저씨는 영어를 못했고, 나는 아랍어를 전혀 못했다. 우리는 잠시동안 ‘Yes’, ‘No’, ‘OK’ 세 단어 만을 이용하여 ‘몸으로 말해요’ 게임을 했다. 아저씨가 내 깊은 뜻을 이해했다고 싶어서 의자에 앉는 순간, 아저씨의 이발기는 내 정수리에 길게 길을 내버렸다. 문득 중고등학교 시절에 늘 가던 이발소 아저씨가 생각이 났다. 당시 유행하던 상고머리를 하고 싶어서 ‘아저씨, 윗머리는 절대 자르지 마시고요. 옆머리랑 뒷머리만 다듬어 주세요~’ 라고 부탁을 해도 아저씨는 ‘학생은 스포츠머리지!’ 하며 밤톨같은 머리를 만들어 주셨었다. 20년 만에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으니 그 때 생각이 나서 슬며시 웃음이 났다.
< 오빤 아랍 스타일! >
곱슬머리 아랍 청년에게 늘 해주셨던 짧은 머리 스타일을 낯선 동양 청년에게 선물해 주신 아저씨는 동양 청년이 슬며시 웃음를 띄는 것 같이 보이자 신이 나셨나 보다. 가위를 내려 놓고 칼을 드셨다. 아랍 이발소의 꽃은 면도가 아니겠는가! 수염도 별로 없는 내 얼굴에 산타할아버지 같은 거품 수염을 달어주시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면도를 시작하셨다. 만족스러운 면도를 마치고는 이번에는 굵은 실을 잘라 오시더니 양손에 걸고 입에 물어서 팽팽하게 만들어서 내 얼굴 곳곳을 쓸어 내리셨다. 얼굴에 솜털이 실에 얽혀서 뽑히는데 눈물까지 쏙 뽑혔다. (한달 뒤에 터키에서 체험한 아랍식 이발에서는 불방망이를 가지고 얼굴을 스치면서 솜털을 태우는 놀랍도록 화끈한 경험을 했다.)
면도와 솜털 제거까지 마치고 나자 아저씨는 양손에 알콜을 듬뿍 묻혀서 내 얼굴을 비비시며 소독의 과정까지 해주시고, 머리에는 정성스럽게 기름을 발라주시기까지 했다. 아저씨, 머릿기름까지는 부담스러운데...
이미 자른 머리를 어찌하겠는가. 다시 길겠지 하는 생각에 고생하신 이발사 아저씨에게 ‘슈크란! 슈크란!’을 연발하며 이발소를 나와서 거리를 걷는데, 지나가는 요르단 청년들이 그들과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한 나를 한번씩 쳐다보며 지나간다.
저 낯선 동양 청년에게서 익숙한 아랍의 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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