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차(茶)가 아닐까 싶다. 스리랑카의 옛 이름인 실론을 얘기하면 누구나 실론티를 떠올릴 만큼 스리랑카의 차는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19세기 중반까지는 홍차보다는 커피 생산지로 유명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9년에 병해로 인해 커피 농장이 전멸한 이후에 지금의 차 재배를 시작했고 최적의 재배환경과 영국의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지금의 세계적인 차 생산지가 되었다.
엄청난 규모의 커피 플렌테이션이 병해로 하루 아침에 망한 절망의 땅에 차를 재배하여 지금의 실론티의 명성을 만들고 본인도 엄청난 부자가 되신 양반이 있으니, 그가 바로 토머스 립톤 경(Sir Thomas J. Lipton)이다. (편의점에서 본 립톤 아이스티의 그 립톤 맞다.) 스코틀랜드 식료품점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장사 수완이 뛰어났고 20대 초반에 직접 식료품점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마케팅 기술을 이용하여 크게 성공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아삼 지방에서 수입해오는 홍차에 붙는 마진을 줄이고자 홍차 도매상을 운영하다가 병해로 커피 농장이 완전히 망한 실론으로 가서 직접 홍차 농장을 운영하기에 이른다. 그 곳이 바로 하퓨탈레의 차밭인 것이다.
엘라에 머무는 동안 스리랑카에서 차 재배지로 가장 유명한 지역인 하퓨탈레(Haputale)를 찾아갔다. 엘라에서 하퓨탈레까지는 기차로 1시간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다. 엘레에서 하퓨탈레로 향하는 기차길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하다. 고산 지대라서 안개인지 구름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희뿌연 아침 철로를 달리면 주변으로 녹차 케잌이 쌓여있는 듯한 차밭들이 펼져진다. 한참을 녹색의 물결 속을 달리다가 도착한 하퓨탈레역은 엘라역 만큼이나 작고 아름다웠다. 하퓨탈레 역에서 당장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낡디 낡은 미니버스를 타고 담바텐네(Dambatenne) 차 공장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오늘의 목적지인 Lipton’s seat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엘라에서 하퓨탈레로 향하는 기차 >
< 동화 속의 기차역 같은 하퓨탈레 역 >
우리나라 보성에 가면 아름다운 녹차밭이 있다.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걸어가면 작은 녹차 카페가 나오고 뒤로 짙푸른 녹차밭이 산을 타고 펼쳐진다. 보고만 있어도 몸과 마음이 청량해지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여기 하퓨탈레에 차밭을 오기 전까지만 해도 보성의 차밭과 큰 차이가 있을까 싶었는데, 담바텐네에서 내려 Lipton’s seat까지 가는 길은 보성의 그곳과 사뭇 달랐다. 하이-그로운 티의 명소답게 해발 2000미터이 고산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고 있지만 땀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시원한 공기가 눈 앞에 펼쳐진 녹색의 향연과 함께 몸과 마음에 청량감을 주었다. 아침 일찍 도착한 덕분에 아무도 없는 농장 길을 따라 이슬을 머금은 차잎을 보며 아내와 함께 걷는 기분은 지금까지 느꼈던 어떤 산책보다 황홀했다.
< 이른 아침의 하퓨탈레 차 농장 >
< 2000미터 고산에 끝없이 펼쳐진 차밭 >
진녹에 푹 젖어
상쾌한 마음으로 언덕을 올랐다.
걷고 또 걸어도 끝없이 차밭이 펼쳐져
있고,
립톤 경이 경치를 즐겼다는 Lipton’s
seat은 아무리 가도 나오지 않았다.
차 농장의 언덕길을 무려 6km를
걸어야 나온다는 안내판을 봤지만,
상쾌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걷다보면
금새 도착할 줄 알았다.
한참을 걷다가 지나가는 트랙터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세웠다.
어짜피 길은 하나 밖에 없었고,
짐칸은 비어있었기에 쉽게 얻어타고
이번에는 녹색의 풍경 속을 신나게 달렸다. 차밭을 걸어본 사람은 많아도 차밭을 오픈카(?)로 달려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도 서있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덜컹거리는 짐칸에서 비명에 가까운 환호를 지르면서 차밭을 누볐다.
< 차밭을 달리는 기분 간접체험용 >
Lipton’s
seat은 립톤 경이 차농장을 운영하는
동안 차를 마시면서 경치를 감상하던 자리였는데,
끝없이 펼쳐진 차농장과 높은 고산이
한 눈에 보이는 전망이라 스리랑카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들르는 명소이다.
다만 고산지대라서 날씨 운이 따르지
않으면 맑게 개인 풍경을 보기 어렵다.
그 운이 따르지 않은 사람이 바로
나였다.
Lipton’s seat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산밑에서 나를 쫒아 구름떼가 추격해왔다.
< 오지마!! 오지마!! >
< 결국 구름이 먼저 앉은 Lipton's seat >
비로소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구름보다 한발 늦었다. 멋진 경치를 고사하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구름 속에 갇혀서 산 정상인지 계곡인지 구분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Lipton’s seat에는 갈 수 있었지만, Lipton’s view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길이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아쉽지는 않았다. 가끔 노력한 결과가 실패일지라도 거기에 이르는 과정이 만족스러웠다면 웃으면서 결과를 받을 들일 수 있을 때가 있다. 바로 Lipton’s seat이 그런 곳이었다. Lipton’s seat은 긴 여행을 하고 있는 나에게 하루하루의 여정을 아름답게 보낸다면 이 여행의 끝이 무엇이더라도 웃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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